1970년대 격동의 이란 국내 정치 상황을 담은 영상자료와 나레이션이 흐르면서 시작되는 영화, <아르고> ... 이 초반 도입부는 한국 영화관에서 개봉되고 있는 '따끈따끈한' 영화라는 것 외에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었던 저에게 순간적으로 '심상치 않은 영화'일 것이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허나, "역시 헐리우드!" 였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CIA는 테헤란 주재 캐나다 대사의 사저로 피신해 숨어있는 6명의 미국 대사관 직원을 기발한 아이디어로 "구출"해내는 '정의의 수호천사'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만약 CIA가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사실은 그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 중의 하나라면?
이란의 학자인 Fara Mansoor씨는 10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방대한 관련 자료들을 꼼꼼한 논리로 정리하여 "이란 인질 사건은 CIA와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은밀하게 결탁하여 양쪽의 정치적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기획된 공작의 일부"라고 단정합니다.
Mansoor씨는 이 사건을 두 개의 틀을 통해 조망합니다. 즉,
팔레비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CIA는 팔레비의 예견된 사망으로 인한 권력의 공백 상황과 그로 인한 자신들의 통제권 상실을 피하기 위해 '포스트 팔레비'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1976년은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인권"을 내세웠던 카터는 CIA의 불법적인 비밀 공작을 비판하며 CIA의 조직 축소를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카터는 당시 CIA 국장이었던 George W. H. Bush를 새로운 인물로 교체하였고, 취임 첫 해인 1977년 '할로윈 데이 (10월 30일)'에 무려 800명의 CIA 요원을 해고 시킵니다. (이름하여 '할로윈 대학살')
이에 CIA 조직내 친 Bush파는 다음과 같은 반격 목표를 설정합니다.
52명의 인질들은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날(1981년 1월 20일)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CIA가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사실은 그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 중의 하나라면?
이란의 학자인 Fara Mansoor씨는 10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방대한 관련 자료들을 꼼꼼한 논리로 정리하여 "이란 인질 사건은 CIA와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은밀하게 결탁하여 양쪽의 정치적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기획된 공작의 일부"라고 단정합니다.
1979년 11월 4일에 일어 난 "이란 인질 사건"은 성난 이란 군중들에 의해 무계획적으로 저질러진 사건 혹은 이란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호메이니 체제가 독자적으로 일으킨 무분별한 행위가 아니라 George W. H. Bush가 이끄는 CIA와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은밀하게 결탁하여 양쪽의 정치적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다. (“The U.S.-Iran hostage crisis was not a spontaneous act by Iranian mobs or a senseless act devised solely by the Khomeini regime. Rather, it was a politically manufactured event by the Bush-led CIA and top Iranian Islamic fundamentalists that was intended to promote the political goals of the Bush-Reagan coalition and Khomeini’s regime simultaneously.”)Fara Mansoor씨의 위와 같은 주장은 Global Research에 소개된 The Real Iran Hostage Crisis: A CIA Covert Op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관련 인터뷰 참조)
Mansoor씨는 이 사건을 두 개의 틀을 통해 조망합니다. 즉,
- 70년대 중반 이후의 이란 국내 정치 상황과 이 격동의 상황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려는 미국 (CIA)의 개입 (권력 이양 공작)
- 미국 파워 엘리트 세력간 조직내의 갈등, 특히 카터 행정부와 CIA(내 친 Bush파) 사이의 갈등
팔레비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CIA는 팔레비의 예견된 사망으로 인한 권력의 공백 상황과 그로 인한 자신들의 통제권 상실을 피하기 위해 '포스트 팔레비'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1976년은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인권"을 내세웠던 카터는 CIA의 불법적인 비밀 공작을 비판하며 CIA의 조직 축소를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카터는 당시 CIA 국장이었던 George W. H. Bush를 새로운 인물로 교체하였고, 취임 첫 해인 1977년 '할로윈 데이 (10월 30일)'에 무려 800명의 CIA 요원을 해고 시킵니다. (이름하여 '할로윈 대학살')
이에 CIA 조직내 친 Bush파는 다음과 같은 반격 목표를 설정합니다.
- 카터 행정부 무력화 : '레이건-부시팀'을 백악관으로!
-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 : CIA 통제하에 있는 반공주의자 호메이니를 '포스트 팔레비'로 내세워 이란의 여타 정치 세력을 무력화 시킨다
- '새로운 세계 질서' 초석 마련 : 이란을 미국의 적성국으로 포장하여 상시적 갈등을 조장함으써 양국에 존재하는 비민주적인 정치적 법적인 구조들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도록 한다
52명의 인질들은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날(1981년 1월 20일)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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