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자율(自律 self-government)’이라는 것은 ‘황극(皇極)의 기술(the art of governing government)’이라 하겠습니다. 이 기술은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발전해 왔으나, 돈에 대한 사람들의 보편적 무지가 불러들인 압제와 폭정에 의해 지금은 말살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가짜 돈’으로 국가가 시민을 속이는 세련된 방식은 돈과 관련된 개념과 어휘들을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뒤틀어 놓음으로써 문명 자체를 위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가 자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습니다. 돈에 대한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한, 국가로부터 돈을 분리시켜 천부적으로 주어진 ‘발권구매력(Money Power)’를 되찾아 오지 못하는 한, 자율은 요원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문제를 극복함에 있어, 이에 대한 해결책을 다른 어떤 개혁들 보다 우선시 하지 않으면서도 자유를 쟁취하겠다는 사람들… 당신도 그런 부류의 사람입니까?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E. C. Riegel, The New Approach To Freedom, 1949
1.
“물물교환의 불편함—욕망의 이중적 불일치 문제 및 교환 비율을 결정할 ‘표준’의 부재—을 해소하기 위하여 화폐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그럴듯한 교과서적 설명을 뒷받침해주는 인류학적, 역사적 증거는 아직까지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인류학자 David Graeber (1961-2020)는 '물물교환이 시간적으로 먼저 이루어지다가 후에 화폐가 출현했다'는 주장을 뒤집는 근거들이 훨씬 더 많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은 여전히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화폐의 출현 이면에 깔려 있는 심오한 형이상학적, 열역학적 의미들을 간과하거나 혹은 애써 가리려 하고 있습니다. 정통과 이단을 막론하고, 경제학의 거두들은 자신들의 이론 구축에 무의식적으로 사용된 열역학적, 형이상학적 가정과 전제 외에 일체의 다른 접근과 비유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허락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John Ruskin (1819-1900)은 다음과 같이 꼬집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관통하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인간들이 사로잡혀 있는 망상 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것은, '너와 나를 가르지 않음'에서 나오는 ‘한마음(social affection)’이 사회적 진보와 발전에 유익한 결과를 낳게 하는 사회적 규범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정치경제학이라고 불리는 현대 학문은 바로 이 망상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2]
단도직입적으로, 돈 혹은 화폐의 본질은 '힘(力)' 입니다. ‘필요로 하지만(=수요) 지금 나에게 없는 것(富)’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공급) 마술과도 같은 힘입니다. 이는 단순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수요’를 드러내고 ‘공급’을 조직하여 연결 시켜주는 실질적인 소셜 미디어이자 ‘부(富)’라는 ‘에너지 변환과 흐름’을 가속화 시키는 매질로, 오직 ‘영혼을 동력으로 삼는 인간'[3]에게만 허락된 현묘한 힘입니다.
이 힘을 통해 인간은 '결핍'과 '고갈'이라는 현상계의 물리적 제약을 뚫고 '무진장(無盡藏)'으로 진입하여, 종(種)으로서의 건강한 자기재생산 유지는 물론,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물리적(physical), 정신적 (metaphysical) 제약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개개인들이 단순 생존(生存)을 넘어 저마다의 개성 넘치는 자유로운 존재로 현존(現存)[4]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 C. Riegel (1879-1953)은 이 '힘(力)'을 "Money Power"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발권구매력(Money Power)'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화폐의 발권력(Issuing Power)과 구매력(Purchasing Power)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힘’이 전제되어야만 ‘지금 나에게 없는 필요(富)’를 얻게 해주는 ‘구매’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발권구매력(Money Power)'과 관련하여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발권력(Issuing Power)은 공동체 내의 한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부(富)를 기꺼이 포기할 때에만[5], 오직 이 경우에만 솟아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포기된 부(富)의 수혜자에게 치솟는 '감사의 마음(신세짐)'과 '언젠가 꼭 신세를 갚겠다는 마음'이 구매력(Purchasing Power)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발권구매력(Money Power)'은 ‘너와 나’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즉 ‘너와 나를 가르지 않는 높은 차원의 의식’ 수준인 ‘한마음’에서 피어나는 현묘한 힘이지, 지금처럼 어느 일방(독점 발행권을 갖고 있는 특정 기관)이 홀로 ‘허공에서(out of thin air)’ 음흉하고 비밀스럽게 부리는 그런 사술(邪術)이 아니며, 그 사술에 사용된 ‘돈’이라는 소재의 물질적 속성에서 구매력(Purchasing Power)이라는 힘이 나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발권구매력(Money Power)'을 통해 ‘구매를 한다’는 것은 ‘수요(필요)라는 사전적 정보’와 ‘그에 대한 평가라는 사후적 정보’를 시장에 보내는 자신의 사적인 재량권을 발휘하는 것이기에, 타인 혹은 제 3자에게 양도되거나 박탈될 수 없는 천부적인 권리라는 점 역시 강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필요와 만족’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달을 ‘나’ 외에 그 어느 주체도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富)—모든 경제 계획—는 오직 자신들의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는 개인들에게서만 솟아날 수 있으며, 이를 가능케 하는 정치적, 경제적 힘 모두가 개개인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투표용지는 그가 휘두를 수 있는 정치적 힘의 도구이고, 돈은 경제적 힘의 도구입니다. 경제적 힘이 없는 정치적 힘은 앙꼬 없는 찐빵과도 같습니다.
정부가 자신들의 공복(公僕)임과 동시에 자신들을 부자로 만들어 줄 든든한 후원자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그저 순진한 봉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스려야 하듯이 정부도 다스려야만 합니다. 오직 우리 자신들만이 유일한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구매라는 행위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구매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사적인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폐를 발행한다는 것은 구매를 한다는 것이며, 구매를 한다는 것은 평가(투표)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폐 발행 권한은 타인에게 양도될 수도 없으며, 그 개인에게서 박탈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
우리 스스로 이 화폐의 통제권을 회복하지 못하는 한 그 어떤 정치적 실험도 실패로 귀결될 것입니다.…. 경제적 힘을 정부의 통제 하에 맡겨 놓음으로써 정치적 힘 마저 무력화 시켜 놓고서도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여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6]
따라서, 이 '발권구매력(Money Power)'이 박탈되어 타인 혹은 제 3자에게 양도 된다는 것은 (1) 경제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의 신호 왜곡에 따른 자원의 할당 및 교환 과정 자체의 연쇄적 왜곡을 초래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시장의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며, (2) 정치적으로는, 자신에게 부여된 천부적 재량권을 박탈당했기에 굴종과 예속이라는 노예의 처지에서 한 발도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7]
우리 할배들께서는 이 신묘한 힘(Money Power)의 원천인 '기꺼이 포기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증표(fiat)'로 만들어, 공동체 내에서 이 ‘감사의 증표’를 제시하는 자에게 다른 구성원들 역시 자신들이 여벌로 갖고 있는 부(富)를 기꺼이 포기하게끔 함으로써, 공동체 내의 부(富)를 연쇄적으로, 효율적으로 적재 적소로 이전시켜 새로운 부(富)가 끊임없이 '창출-소비-재생산' 될 수 있도록 하는 놀라운 지혜를 발휘 하셨습니다.
이 '기꺼이 포기함과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라는 ‘한마음(social affection)'[8]이 ‘사회 발전에 유익한 결과를 낳게 하는 사회적 규범’인 것이며, 이는 비록 원시적이기는 했지만, 후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며 경배해 마지않았던 시장의 ‘가격 책정 시스템’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육(肉)이 영(靈)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는 것이 신비라면 (현상계의 개체성이 그 개체성을 초월한 절대계의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신비라면), 영(靈)이 육(肉)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는 것은 신비 중의 신비다. 이 어매무시한 부(富)와 풍요가 어케 이 보잘것없는 것에 거(居)하고 있는지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 도마복음 29절
2.
어찌되었든,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기꺼이 포기함에 대한 감사의 증표'가 바로 ‘돈’이라고 불리는 ‘교환 매질(medium of exchange)’[9]이며, 이 매질은 소비와 (재)생산 과정에서 부(富)의 순환 촉진과 증대라는 중요한 촉매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를 열역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돈’이라는 ‘교환 매질’은 부(富)의 '소비 과정’을 가속화 시키는, 즉 '에너지 변환과 흐름'을 가속화 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앵글로색슨인들에게 부(富)를 의미하는 ‘Wealth’라는 단어는 ‘인간의 Well-being을 증대 시켜 주는 어떤 것’을 의미했습니다. 즉, ‘잘 먹고 잘 사는(well-being)’정도를 증진 시켜주는 유용한 모든 것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필요(경제학 용어로는 ‘수요’)를 충족 시켜주거나 충족 시켜줄 수 있는 ‘모든 유무형의 물리적 상태’가 ‘부(富, Wealth)’인 것입니다.[10]
이 때, 부(富)에 대한 정의 및 이해와 관련해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가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소유의 측면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역량과 능력’[11], 즉소비의 측면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것과 ‘에너지 흐름의 밀도(Energy Flux Density)’[12]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산 – 분배 – 소비’라는 경제학 교과서의 평면적인 구분과 단선적인 설명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생산은 창조이고, 소비는 소멸, 탕진 혹은 낭비”라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에너지의 흐름과 변환’이라는 열역학적 관점에서의 ‘소비’는 이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그림을 보여줍니다.
흥미롭게도, 이 소비의 진면목은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분들에 의해서 포착되고 있습니다. 먼저, 문화 예술 평론가였던 John Ruskin (1819-1900)은 이렇게 언급합니다.
“경제학자들은 대개 순수한 소비(consumption absolute)에는 아무런 유익함도 없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소비 그 자체(consumption absolute) 야말로 모든 생산의 목적이고 꽃이며 완성인 것입니다! 현명한 소비는 현명한 생산보다도 더 어려운 기술입니다.”
“모든 생산은 본질적으로 '입’(소비를 말함 - 역자)을 위한 것이고, '입'에 의해 평가됩니다. 거듭 주장하듯이 소비야말로 생산의 꽃이고, 한 국가의 부(富)는 오직 소비된 것으로만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비의 방식과 그에 따른 결과야말로 생산의 진정한 시금석입니다. 생산은 공들여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 유용하게 소비될 수 있는 물건을 의미합니다. 한 국가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얼마나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삶을 가능하게 하느냐입니다. 소비가 생산의 결과이자 목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삶(life)은 소비의 결과이자 목적이기 때문입니다.”[13]
그리고, ‘Kitson Light’라는 등유 전등을 발명한 사업가이자, 수많은 특허를 보유한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Arthur Kitson (1859 – 1937)은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합니다.
"일반 사람들에게 생산과 소비라는 용어는 창조와 소멸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며, 경제학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생산과 소비' 라는 주제에 대한 자연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생산된 부(富)는 생산적으로 소비되거나, 재생산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비는, 마치 불사조처럼, 다시 소생하기 위한 수단을 잉태함으로써 소비된 재(灰)로부터 새로운 부가 샘솟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생은 영적 세계 뿐만 아니라 물질 세계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이는 발명과 발견의 영역으로, 건조한 뼈에서 어떻게 생명을 재생산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어떻게 소비의 산물로부터 부(富)가 재생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계 수단은 거의 무한대로 되고 있습니다. 자연을 인색한 존재로 여겨 그 자원들을 한정된 것으로 간주하기 보다는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되면 자연은 우리에게 끝없는 보급품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14]
그리고, 모든 부(富)는 예외 없이 '열역학적 평형과 거리가 먼 물리적 상태(thermodynamically improbable state)’[15]라는 점이 강조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富)는 '소비'라는 에너지 변환 과정에서 엔트로피 감소 작용을 일으키며 부(富)의 끊임없는 재생산을 가능케 하고[16], 이를 통해 인간계의 질서를 고도화 시킴과 동시에 지속적인 진화가 가능하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열역학 제2 법칙’이 인간계에서는 오류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富)의 '생산적 소비 과정'이란 '음(陰)의 엔트로피(negative entropy)'[17]를 유입하는 과정 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생산적 소비 과정'을 가속화 시켜주는 화폐라는 매질은 '음(陰)의 엔트로피 (negative entropy)' 발생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경제(학) 이론들은 부(富)에 대한 열역학적, 형이상학적 접근을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차단하면서, 부(富)의 (재)생산 과정, 즉 "부(富)가 소비되고 그 소비에 의해 새로운 부(富)가 생산되는 과정보다는 부(富)의 소유권에 더 큰 관심을 갖고”[18] 손쉬운 법률적 관점으로만 접근하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 오류는 권력 지향적이며 법적 사고 방식에 익숙한 ‘영악한’ 자들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서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재생산 되고 있고, 결과적으로 부(富)의 (재)생산에 절대적 요소인 에너지와 그 ‘에너지 흐름의 밀도(Energy Flux Density)’라는 중요한 주제는 경제학에서 완벽하게 배제되어, 부(富)의 과학이 아닌 ‘결핍의 학문’이라는 오명을 얻게 됩니다.
“인간의 필요와 탐욕 사이의 구분을 교활하고 애매하게 흐려 놓는 의견들을 여전히 부(富)의 과학으로 대접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낳은 것은 '실질적 과잉 속의 인위적 빈곤' 이라는 괴물입니다. 이런 현실이 이전 결핍의 시대와 뭐가 다를 바 있겠습니까? "새로운 경제학"은 부(富)의 과학이며, 낡은 경제학은 결핍의 학문입니다.”[19]
요약하자면, 돈 혹은 화폐는 인간계에서 (1) 타인을 위해 자신의 부(富)를 기꺼이 포기하도록 함으로써 부(富)의 ‘생산적 소비’를 가속화 시키는 촉매이자, (2) ‘수요와 공급’을 최적으로 연결시켜 시장의 ‘가격 책정 메커니즘’을 작동케 해주는 소셜 미디어임과 동시에, (3) 결과적으로 ‘에너지 흐름의 밀도(Energy Flux Density)’를 증가시키면서 전체적인 부(富)의 증대를 통해 인간계의 질서를 고도화 시키고 지속적인 진화를 가능케 해주는 '음(陰)의 엔트로피 발생기'입니다. 그리고, 이는 '희소' '결핍' '고갈' 등을 특징으로 하는 유한한 물질세계의 한정된 장(場)에서 벗어나 '무진장(無盡場)'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3.
지구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서, 세포 내에 엽록체와 미토콘드리아를 모두 갖추고 있는 식물들과는 달리, 동물들은 오직 미토콘드리아만 갖추고 있기 때문에 부족한 에너지를 외부에서 공급 받아야 하는 소위 ‘종속 영양’을 해야 합니다. 존재 자체가 '결핍'이기에, 생존을 위해서는 상호간 약탈을 할 수밖에 없는 ‘양아치’의 운명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인간도 예외 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약 6천여 년 전, 머리 밝은 우리 환웅들께서는 현상계의 제약 속에서 '무진장(無盡藏)'으로 진입하는 비밀의 통로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서, ‘즘생’ 수준의 인류를 거듭나게 하여, 동식물들이 부러워할 만한 '신시(神市)'라는 찬란한 에너지(富) 생성과 교환 시스템을 이 땅에 구현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류는 이를 신화로 호도하며 다시 '상호간 약탈'이라는 ‘양아치’ 시스템으로 복귀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기꺼이 포기함과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라는 한마음이 설 자리를 잃어, 그 '증표'의 원래 취지와 의미가 왜곡되고 전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증표'란 ‘포기된 부(富)’에 대한 단순 기록(=簿記)일 뿐, 그 기록을 위해 사용된 소재의 물리적 속성(物性)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장부(帳簿)에 지나지 않음이 거듭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20] 우리 할배들께서 애초에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로 증표를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단순 기록(=簿記)일 뿐인 증표가 돌연 '부(富) 자체'로 여겨지게 되고, 급기야 휘황찬란한 거죽까지 뒤집어 쓰고 'God of Money'라는 권좌에 올라 지금까지도 온 세상의 신도(信徒)들로부터 ‘예외 없는’ 절대적 숭배를 받고 있습니다.
‘햇빛’이 태양 그 자체는 아니듯이, 그리고 힘이 발현되는 장치일 뿐인 ‘엔진’이 힘 그 자체가 될 수 없듯이, 돈 혹은 화폐라는 ‘증표’ 역시 그 자체가 힘(Money Power)이 될 수는 없음에도, 돈을 부(富)로 착각하고 숭배하게 된 데에는 안타깝고 가슴 아픈 복잡한 사연이 있습니다.
먼저,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소위 '확장성’과 관련한 ‘기술적’인 문제로, 해당 증표가 통용되는 공동체의 외연 확장에 따라 증표의 위변조 가능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이를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증표의 발행 권한을 '권위 있고 신뢰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기관(신전 혹은 국가)'에 위임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지게 되는데, 이것이 치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는 '기술적 한계'였다기 보다는—물론 한계가 없었다고 부인할 수는 없지만—공동체 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자들 가운데서 본심(本心)을 잃고 사악한 의도를 공모한 자들이 내세운 그럴듯한 '구실 혹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들에 의해 증표의 발행 권한이 ‘권위 있고 신뢰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기관’ 으로 양도 및 독점되면서, 구성원 개개인들에게서 샘솟아야 할 한마음 즉, '기꺼이 포기함에 대한 감사의 마음 (Money Power)'은 당연히 설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대신 이들은 그 빈자리에 소위 '가치'라는 유령을 인위적으로 호출하여 "증표가 곧 부(富)"라는 왜곡과 전도(顚倒)를 자행했던 것입니다.[21]
E. C. Riegel은 애초 공동체 내의 개인들 상호간에 ‘부기적 개념(accounting concept)’으로 통용되었던 화폐(증표) 시스템을 '개인화폐시스템'이라 불렀고, 특정 집단에 의해 발행권이 독점되면서 화폐(증표)가 ‘부(富) 자체’라는 ‘물질적 개념(material concept)’으로 왜곡 및 전도된 시스템을 '정치화폐시스템'이라 부르며 둘을 철저하게 구분하였습니다.
정치화폐시스템에서 한마음을 대신하여 호출된 ‘가치’라는 유령은 (1) 애초에 정량화 되기 힘든 '신세짐'을 이자를 포함하여 갚지 않으면 곤란해지는 '이자 낳는 부채'로 정량화 시키고, (2) 여기에 증표가 지닌 ‘구매력(Purchasing Power)의 '부(富)에 대한 청구'라는 법적인 측면을 전면에 부각시켜서 "증표가 곧 부(富)”라는 집단적 착각에 빠지게 한 후, 그 변제에 실패할 경우 폭력의 사용이 법적으로 정당화 되도록 하였으며, (3) 앞서 강조하였던, 발행된 증표에 상응하는 '부(富)의 포기'가 실질적으로 일어나지 않음으로써[22] 부(富)의 부당한 이전이 진행될 개연성을 현실화 및 정당화 시키게 됩니다.
상응하는 ‘부(富)의 포기’ 없이 은행가의 펜 끝과 컴퓨터 키보드에서 ‘이자 낳는 부채’의 형태로 돈이 창출되는 현대 금융시스템 ('부분 지급 준비금 시스템 fractional reserve banking system)'은 위에서 언급한 (3)의 개연성이 현실로 실현되고, 여기에 (1)과 (2)의 ‘후가공 공정’이 정교하고 치밀하게 결합된 결과입니다.
심지어 이 증표가 '물질적 소재' 자체를 벗어 던지고 원래 있었던 자리인 ‘디지털’이라는 순수한 추상의 영역으로 이미 복귀한 마당에도 '가치'라는 유령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기는 커녕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사실, '가치(value)'란 인지된 어떤 것, 즉 오로지 숫자로만 표현 될 수 있는 ‘공통 분모’라는 추상적 관념으로, 어떤 사물이 지니고 있는 '가치 있음'이라는 '효용(utility)' 또는 '부(富)에 대한 청구'를 의미하는 '구매력(purchasing power)'과는 철저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William S. Jevons(1835-1882)는 ‘가치(value)’를 ‘효용(utility)'과는 구별되는 ‘교환비율(ratio of exchange)’로 정당하게 정의함으로써 '가치'라는 개념을 둘러싼 혼돈을 피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으나, ‘가치(=교환비율)’와 '구매력(purchasing power)'을 구별하지 않고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여전히 문제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 역시도 ‘표준 단위(a standard unit)’라는 것을 통해 질량, 거리, 면적 등을 측정할 수 있는 것처럼, ‘가치(=구매력 purchasing power)’ 역시 ‘가치의 표준 척도(a standard unit of value)’라는 것을 통해 어떤 고정된 정량으로 표현될 수 있는 가치 표준(standard of value)이 존재한다는 함정에 매몰되고 만 것입니다.[24]
그러나, ‘사랑의 표준 척도’, ‘사랑의 저장’ 등이 매우 황당하게 들리는 것처럼, ‘가치의 표준 척도’, ‘가치 저장’ 등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인 순수 착각이자 망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그런 것이 실재하는 양 떠받들고 조아리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유령 혹은 미신이라고 부릅니다.[25]
경제학이라는 과학(?)은 21세기의 현 시점에도 이 '유령'을 여전히 걷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걷어 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기꺼이 포기함과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인 한마음(social affection)'을 과학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대를 이어 지탱해 온 ‘가치’라는 '유령'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26]
물론, 이 ‘가치’라는 유령과 미신의 생명이 이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이유는 한마음을 잃은 자들의 욕심이 낳은 무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원하는 모든 것을 갖을 수 있고, 심지어 어느 정도 쌓이기 시작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하는 ‘물건(=돈)’이기에 가능한한 최대로 챙겨서 쟁여 놓는 것이 현명한 처세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Silvio Gesell (1862-1930)은 다음과 같이 정곡을 찌르며 이 정치화폐시스템의 민낯을 폭로합니다.
"현 경제적 삶의 기본 골간은 ‘타인의 절박함 혹은 약점’ 등을 이용해 개인의 이득을 극대화 하고자 하는 ‘상호간의 약탈 구조’ 입니다. 이 심보에 기반한 교환 원리는 고리대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 '획기적인 발견'은 뉴턴이 발견한 중력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사소한 것이지만, 이 발견은 경제학에 있어서 뉴턴의 발견과 같은 획기적인 의미를 갖습니다."[27]
4.
‘감사의 증표’인 교환 매질의 다른 이름은 ‘신세짐’입니다. ‘빚’ 또는 ‘부채’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증표의 발행과 함께 일어나야 하는 '부(富)의 포기'가 증표 발행 시점에 실질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개연성”이 현실화 된 경우를 ‘신용’이라고도 부릅니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 이 증표라는 매질은 그 자체가 '부(富)'가 될 수 없는, ‘장부상의 수치’에 불과한 ‘부채’라는 점을 거듭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부채’가 지니고 있는 '부(富)에 대한 청구'라는 측면에만 경도되어 부(富)와 부채의 경계를 ‘교활하고 애매하게 흐려’ 놓으며 ‘이재학(理財學)’에 빠져 있을 때, 화학자인 Frederick Soddy(1877-1956)는 여기에 상식이라는 과학의 칼을 들이댑니다.[28]
"부(富)는 양(陽)의 물리적 양(量)이지만, 부채는 음(陰)의 양(量)입니다. .... 부(富)란 측정될 수 있는 양(陽)의 수량이며, '부(富)에 대한 청구'일 뿐인 돈은 사실 부채이고, 이 부채는 갚아야 할 부(富)의 양(量)을 표시하지만, 그렇다고 돈의 소유자가 그 부(富)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29]
즉, 부(富)는 열역학 법칙이 적용되는 물리적 영역에서의 ‘물리적 양수(+)’이지만, '부채'는 수학의 법칙이 적용 되는 추상의 영역에서의 ‘수학적 음수(-)’일 뿐, 그 어떤 법적인 권리가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애초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돈’에 대한 형이상학 차원에서의 이름은 ‘기꺼이 포기함에 대한 감사 혹은 신세짐(빚)’이고, 열역학 차원에서의 이름은 ‘소비라는 에너지 흐름을 가속화 시키는 촉매이자 음의 엔트로피 발생기’ 입니다. 그리고 이는 오직 추상의 차원에서 수학적 음수(-)로만 표현되는 '부채'로써, 장부상의 수치일 뿐인 ‘가상의 부(富)’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자연법을 따르기에, 여기에는 너와 나를 가르고, 네 것, 내 것을 따지는 ‘법’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손’의 신묘한 조율만이 있을 뿐입니다.
‘너와 나를 가르지 않음(=기꺼이 포기함)에 대한 감사의 마음’, 즉 ‘신세짐(=빚)’이 추상의 영역에서 날라온 음수(-)와 만나서 기존에는 없었던 새로운 부(富)라는 양수(+)를 엔트로피의 증가 없이 물질 세계에 나투는 신비!!! 이것이 바로 돈이 부리는 연금술의 실체입니다.
특히, 이 ‘신세짐(=빚)’이라는 음수(-)는 기존에 존재하는 부(富)에 대한 청구 뿐만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실현되지 않은 부(富)에 대한 청구도 가능케 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신용’이라는 음수(-)입니다. ‘신용’의 다른 이름은 ‘적극적 신세짐’이자 ‘빚을 질 수 있는 능력’ 즉, 적극적 발권능력(Issuing Power)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공동체 내에서 ‘신용’이라는 음수(-)가 장부상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채무자(=구매자)’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요청한 ‘아직 실현되지 않은 부(富)’에 대해 ‘채권자(=판매자)’가 그 필요를 인정하고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양수(富)를 포기한다는 것, 또는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의미하며, 이는 공동체 내에서 부(富)의 연쇄적 포기를 촉진시켜 궁극적으로 ‘채무자’가 요청했던 새로운 부(富)가 ‘채무자’에게 전달되게 됩니다.
개인화폐시스템에서의 개인들은 ‘채무자’와 ‘채권자’의 지위를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에, ‘채무자’의 지위에서 호출한 음수(-)를 ‘채권자’의 지위에서 보유하고 있고 (혹은 보유하게 될) 양수(富)로 일시적 혹은 차등적으로 상쇄시켜 정산(精算)이라는 아름다운 종결을 짓게 됩니다. 무(無)에서 나와 다시 무(無)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Frederick Soddy는 이 ‘적극적 신세짐’인 신용의 긍정적 역할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는 이 신용의 힘을 통해 발행된 화폐의 양으로 표시되는 총구매력에 상응하는 부(富)보다 더 많은 부(富)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신용을 통해 발생한 부채에 대해서는 이자를 지급할 필요가 없습니다!”[30]
그리고, 신용 문제 전문 법률가였던 H. D. MacLeod(1821–1902)는 상인들의 신용(=빚을 지는 능력)을 부(富)에 포함시키는 것을 망설였던 초기 경제학자들을 비웃으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빚은 어떻게 생성되는가?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동의로, 즉 인간 의지의 명령으로 생성된다. 두 사람의 동의로 생성된 빚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지구상의 물질에서 추출된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절대 무(無)에서 창출된 귀중한 산물이며, 소멸될 때는 인간 의지의 명령에 의해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어머니 대지와 인간 외에 인간의 의지라는 제3의 부(富)의 원천이 있음을 알 수 있다."[31]
‘어머니 대지(地)’에 이어 ‘인간 의지(=天, 한마음)’가 부(富)의 원천 중의 하나 임을 알아차리게 됨으로써, 그저 생산요소들 중의 하나인 ‘노동(人)’으로 격하되었던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제 ‘부(富) 자체’인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의 경지로 다시 복원(復本)되게 된 것입니다.
160년 전, “부(富)의 참된 광맥은 암반 속이 아닌 사람의 핏속에서 발견될지도 모른다”[32]는 John Ruskin의 조심스러운 예측은 옳았습니다. 그간 ‘노동(人)’을 생산요소의 하나로 묶어 놓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협소한 이해에 기반한 오류였으며, 또한 그것이 포괄해내지 못하는 영역을 인적 자본(human capital), 문화 자본(cultural capital), 상징 자본(symbolic capital) 등으로 분절 시켜 덧칠하는 시도 역시 또다른 함정을 스스로 파는 오류에 불과합니다.
가치는 희소한 것(희소성)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함 혹은 유일함(uniqueness)' 속에서도 피어납니다. ‘1과 자기 자신만을 약수로 갖는’ 수인 무궁무진한 소수(素數)처럼, ‘1(=한마음, 天)과 자기 자신만을 약수로 갖는’ 개개인의 독특한 모든 삶 자체가 부(富)라는 가치를 창출하고 실현시키는 핵심 생산수단이자 소비처인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 눈부시게 찬란한 존재들의 에너지 분출과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바로 ‘너와 나를 가르지 않은’ 한마음에서 비롯되는 ‘신세짐’, 즉 ‘서로가 서로에게 신세(=빚) 지는 능력’에서 나옵니다.[33]
그러나, ‘에너지'를 생각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고갈’을 생각하고, ‘부(富)’를 생각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희소와 결핍’을 떠올리는데 익숙한 우리들에게, “빚을 진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대부분이 “버티고 버티다가 밀릴 때까지 밀려서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이 취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빚을 진다”는 것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필요가 부르자, 추상의 영역에서 음수(-)가 살포시 날라와, 기존에 없던 부(富)를 새로이 나투고서, 그냥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그런 ‘가볍고 발랄한 과정’이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어째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어찌하여 ‘제3의 부의 원천’이라는 ‘빚을 짐(=신세짐)’이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불경스럽고 부정적인 것이 되었을까요? “빌린 돈을 갚는 것은 당연한 도의적인 문제로 여기면서도, 돈을 습관적으로 혹은 직업적으로 빌려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악하다”[34]고 여기는 우리들의 인지적 혼동의 뿌리는 도대체 어디일까요?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 역사의 어느 시점에 본심(本心)을 잃은 자들에 의해 시도 되었던 ‘사악한 공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화폐의 독점적 발행권 확보를 통해 음수(-)인 돈(-)을 양수(+)로 바꿔 치는 대범한 ‘장난질’이 시도되었고, ‘과거의 우리들’은 어리석게도 이를 알아차려 저지하지 못하고 묵시적으로 방조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아름다운 음수(-)인 돈(-)을 불러올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거세하여 망각의 늪으로 던져버린 우리들은 이에 대한 대가로 돈(+)을 구걸하고 좇아야 하는 ‘영원한 갈증과 배고픔’이라는 Tantalus의 형벌을 수천 년째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너와 나를 가르지 않는 본심(本心)’을 잃어버린 ‘나뿐인 마음’들의 탐진치(貪瞋癡)가 우리 스스로를 찬란한 존재에서 왜소한 존재로 전락시켰던 것입니다.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 <장날>, 노천명
“대추 밤을 돈사야” …. 이 괴기스러운 시어(詩語)는 돈(-)을 발행할 권리를 스스로 박탈한 인간들이 맞닥뜨린 적나라한 현실을 드러내는 한탄조의 푸념이며, 돈에 팔려갈 대추를 슬퍼하는 딸아이의 울음과 함께 가슴 먹먹한 ‘추석’ 풍경을 전해 줍니다.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먼저 돈(+)이라는 특별한 ‘상품’을 구걸해야만 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 인간들은 이 돈(+)을 얻기 위해 (1) 먼저, 자신의 현존 (現存 = 생명, 노동, 자존 등)을 포함하여 보유하고 있는 양수(富)를 팔아 ‘돈(+)을 사거나’, (2)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권위 있는 기관’을 찾아가 그에 상응하는 담보 제공은 물론이고 ‘이자’라는 추가 비용까지 지불하고 ‘돈(+)을 사야’ 합니다. 또한, 심지어 같은 돈(+)일지라도 개인의 신용등급에 따라 ‘이자’가 달라지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감내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닐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맬더스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점유하고 있는 세상에 태어나 가족의 지원도 받을 형편이 못되고, 사회도 그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양식을 요구할 최소한의 권리 조차 없다 하겠습니다. 이 지구상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자연의 연회에서 그들을 위한 음식 접시는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연은 그들에게 스스로 사라져줄 것을 명할 것이고, 그 명령을 집행함에 있어 결코 미적거리지 않을 것입니다."[35]
반면에, 이 ‘성공한 장난질’을 공모했던 소수의 술사(術師)들에게 ‘양(富)의 탈을 쓴’ 돈(+)은 말그대로 엄청난 힘을 부여해주었습니다. 엄청난 축재(蓄財)는 말할 것도 없고, 공동체의 대의를 빙자해가며 전쟁 및 대규모 사역 등과 같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사적(계급적)인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위임된 독점적 화폐발행 권한을 언제든지 행사하여, 돈(+)을 구걸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는 ‘나뿐인 마음’들에게 얼마든지 던져(投資) 주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여 이 미천한 무지렁이들이 배가 불러서 집단적으로 “자유”니, “정의”니, “인정”이니 뭐니 해가며 시건방을 떨 경우에는, 그저 돈(+)의 수도 꼭지를 조용히 잠그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5.
정치화폐시스템에서 ‘이자 낳는 부채(빚)’의 형태로 발행되는 돈은 ‘장부상의 음수(-)’일 뿐인 돈(-)이 아닌 양(富)의 탈을 쓴 ‘돈(+)’이라는 ‘상품’입니다. 이는 돈이 단순 기록일 뿐인 부기적 개념에서 벗어나 “상품의 구매를 위해 구매되어야 하는 상품”이라는 어지러운 물질적 개념으로 왜곡 및 전도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가 상품(=富)과 화폐(=부채)의 구분이 애매모호해지는 지점입니다. 공동체 내에서 ‘너와 나를 가르지 않는’ 한마음에서 비롯되는 보편적 능력(Money Power)의 한 축인 발권력(Issuing Power)이 소수에 의해 독점됨으로써 다른 한 축인 구매력 (Purchasing Power)은 자연히 비활성화 모드로 전환될 수밖에 없고, 이를 다시 인위적으로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가치라는 유령을 씌워 ‘이것만 있으면 무엇과도 맞바꿀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구매 대상(상품)’으로 가공하여 개인들에게 강매(=신세지움)를 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부채, 즉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상의 부(富)’인 돈(-)이 이처럼 양(富)의 탈을 뒤집어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부기적 개념의 수학적 음수(-)를 물질적 개념의 양수(+)로 바꿔 치기하는 예의 장난질 때문이었고, 이 장난질이 현재까지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참으로 민망하게도, “이 수학적 음수(-)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음수(-)와 정산되어야 할 양수(+)에 대해서도 청구권을 갖게 된다”는 그들의 얼치기 주장에 대해 지금까지 사람들이 무반성적으로 동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어리석은 동조에 의해, ‘너와 나를 가르지 않는’ 한마음에서 비롯되는 감사(=신세짐)의 연쇄적 선순환은 중단 되고, 대신 ‘빚(=신세짐)의 거래(=판매)’라는 ‘신세지움’의 지옥이 열리게 되어, 현묘한 힘(Money Power)은 오염된 힘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구매력 부족과 시장 왜곡,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엔트로피의 증가와 부(富)의 부당한 이전 등과 같은 모든 사회악의 뿌리는 바로 이 오염된 힘입니다.
물론, 이 ‘신세지움’은 발권력을 독점한 소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던져진 돈(+)이 흐르는 전 과정에서 ‘나뿐인 마음’들 간의 ‘신세지움(=보이지 않는 상호간의 약탈)’도 거의 예외 없이 진행 됩니다.
먼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일방적으로 발행되어 던져진(投資) 돈(+)은 중간 에이전트들을 거쳐 피라미드 밑바닥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수요자의 요구가 정확히 반영된 투자(投資)[36]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따른 자원 할당의 왜곡은 불가피하며 결과적으로 사회적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게 됩니다.[37]
그리고, 이렇게 교환과정에 투입된 돈(+)은 ‘나뿐인 마음’들에게는 교환 매질이 아닌 “뭐든지 할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하고 희귀한 교환 대상”일 뿐이기에, 상품교환과정에서 경쟁적으로 이탈하게 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매질의 부족으로 인한 동맥경화라는 또다른 사회적 엔트로피를 증가시킬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품교환과정 (W – G – W)에서 상품(W)은 매질(G)에 의해 순환 과정에서 빠져 나갑니다. 소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富)의 탈을 쓴 돈(+)이라는 상품은 순환과정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재투입 되어 소위 자본증식과정 (G – W – G’)을 반복 수행합니다.
개인화폐시스템의 경우, ‘기꺼이 포기함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부터 호출 받고 날아온 음수(-)인 돈(-)은 그에 해당하는 새로운 양(富)이 생성되면 스스로 홀연히 사라집니다. (-a) + a = 0 이 되어 아름다운 퇴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화폐시스템의 양(富)의 탈을 쓴 돈(+)은 퇴장을 거부하며 (a) + a = 2a가 되어 돈(-a)이 돈(a)을 낳는 마법을 반복해서 시현합니다. 생산과정에 투입된 여타 ‘상품’들은 새로운 부(富)로의 환생을 위해 소비과정에서 퇴장(=소멸)을 하게 되는데, 이 돈(+)이라는 ‘상품’은 ‘법적인 청구권’ 내세우며 퇴장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환이 완료된 ‘상품’이 순환 과정에서 퇴장하지 않고 재투입 된다는 것은, 수학적으로는 이미 지불한 상품 대금을 이중으로 청구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열역학적으로는 ‘영구기관’처럼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순환 사용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열역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상식 있는 사람들은 이를 ‘사기’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과 법학자들은 이를 정당한 ‘자본의 자기 증식’이라고 우깁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생산과정에서 자기 증식을 하는 자본은 ‘금융적으로 구현된’ 획기적인 열역학적 ‘영구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에너지라는 부(富)의 부당한 이전이 ‘합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뿐, 투입된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순환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단순히 ‘수학적 음수(-)에 대한 법적 소유’라는 가당치 않은 권리 주장에 기반하여, 이 음수(-)와 정산되어야 할 양수(+)에 대해 부당한 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이를 통해 양수(富)의 부당한 이전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38]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이 영구기관에 대한 욕정과 ‘신세지움’을 통한 힘(Money Power)의 오염은 ‘나뿐인 마음’들에 의해서도 중층적으로 진행이 됩니다.[39] <부자아빠 시리즈>의 저자로 유명한 Robert Kiyosaki가 머니 게임의 본질을 ‘누가 누구에게 빚을 지우느냐’의 문제로 파악한 것은 이 정치화폐시스템의 ‘신세지움’ 구조를 제대로 꿰뚫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Kiyosaki의 조언은 간단합니다. 이 게임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현존(現存)을 판 돈(+)을 여하히 모으고 불린 후, 이를 종자돈으로 은행 대출(=돈(+))을 끼고 자산(=영구기관)을 매입합니다. 그리고 매입한 자산을 세(貰)를 놓아 이자 및 대출 원금의 상환을 세입자들에게 전가 시켜 놓으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영구기관의 주인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됩니다.
산술적, 수학적으로는 너무도 자명하며, 예외 일명 없이 모든 사람들은 살아 생전에 이런 기특한 ‘영구기관’을 최소 하나씩은 갖기를 갈망합니다. 부동산, 주식, 채권, 보험, 코인, 환치기, 다단계 그리고 심지어 사채 등에 우리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몰빵’을 넘어 ‘영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 영구기관에 대한 우리들의 ‘소박한 꿈’과 관련된 ‘신세지움’의 문제에 대해서 Frederick Soddy는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그 어두운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제품을 소비할 권리는 부(富)를 창출할 수 있는 잉여(자본)를 소유한 사람들, 즉 실질적 소비 요구가 완전히 충족되어 잉여에 대한 소비를 미래 시점으로 늦추고자 하는 사람들의 손에 점점 더 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잉여를 공동체 내의 생계 박탈자들에게 대여함으로써, 즉 공동체를 상대로 빚을 지게 함으로써 더이상 생산에 기여함 없이 공동체의 미래 수입에 대한 영구적 유치권을 확보하려 합니다.”
“이 시스템 자체는 개선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부(富)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뿌리 깊은 무지와 그로 인한 잘못된 욕정에 있습니다. 즉, 부(富)의 소비와 사용이 아닌 이자 취득을 위한 대여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는 과학적 문명의 평화적 위업 달성을 가로막는 요소입니다.”
“부(富)를 소비하지 않고 이자를 목적으로 빌려주려는 사람들에게 풍요는 비참함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시대의 가장 굴욕적인 광경은 더욱 고귀한 문명의 건설을 위해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어야 할 부(富)를 ‘이자 낳는 빚’으로 변환시키는 것에 전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40]
Kiyosaki 류의 조언대로, 그렇게 해서라도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승자가 되어 현존(現存)을 찾고 자유의 몸이 된다면 모르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41] 그 이유는 형이상학 차원의 잃어버린 본심(本心) 그리고 열역학 차원의 엔트로피와 에너지 흐름 밀도(Energy Flow Density)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는 소위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원천’은 ‘열역학 제2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열린계(open system) 입니다. 그런데, 현상계와 절대계를 넘나드는 ‘알아차림’의 유기체인 인간들은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현상계인 단힌계(closed system)에 자신들을 고립시킬 수 있는 어리석은 바보짓을 할 개연성을 충분히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황금빛에 눈이 멀어 돈(-)을 발행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고, 대신 돈(+)에 대한 ‘갈애의 늪’에 빠지게 된 ‘나뿐인 마음’들은 열린계(open system)로 향하는 형이상학적인(=영적인) 연결 통로를 스스로 차단시켜 한정된 물질계인 닫힌계(closed system)에 스스로를 눌러 앉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닫힌계(closed system)의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던져진(投資) 돈(+)은, 개인화폐시스템에서 ‘음(陰)의 엔트로피' 발생기 역할을 하는 돈(-)과는 달리, 앞서 언급했던 복합적인 자본증식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이자부담을 타인에게 전가 시키려는 마음’, ‘가능한한 최대한 챙겨서 쟁여 놓으려는 마음’ 등과 같은 ‘영구기관’을 좇는 잘못된 욕정과 뒤엉켜 사회적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게 됩니다. 결국 이는 닫힌계(closed system)에서의 엔트로피 증가라는 ‘죽음의 레시피’가 되어 인간계를 ‘열역학적 평형’으로 몰아가게 됩니다. 이를 경제 용어로 다시 옮기면, ‘가격 책정 시스템’의 왜곡에 따른 ‘시장의 실패’ 입니다.
“시장이 상품 교환을 위해 만들어진 도로라면, 돈은 그 도로 입구에 세워져서 통행료를 내는 자만 통과시키는 톨게이트이다.” - 프루동[42]
형이상학적인(=영적인) 차원에서의 ‘한 끗 차이’인 ‘신세짐’(감사의 마음–개인화폐시스템)과 ‘신세지움’ (오직 나뿐인 마음–정치화폐시스템)이 열역학적 차원에서 이처럼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다니, ‘어리석다’라는 표현 외에 달리 할 말이 없고, 이 어리석은 자멸적 행위가 아직까지 인류의 공멸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저 경이로울 뿐입니다.
제자들이 물었다. "할례는 유익한 것인가요?" 예수께서 답하기를, "이놈들아, 할례가 유익하다면 아버지께서 이미 어미 배 속에서 까고 나오게끔 해 놓지 않으셨겠느냐? 그보다는 오히려 영혼의 할례가 유익하다." - 도마복음 53절
자연(自然)스럽지 못 한 힘(=에너지)의 생성과 유지(=순환)는 ‘인위적’ 힘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며, 통상 이런 힘들은 ‘폭력’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 그리고 이 오염된 힘이 작용되는 작용점 역시 ‘너와 나를 가르지 않는’ 한마음이 아닌 오직 나뿐인 마음일 수밖에 없고, 그 힘의 방향 또한 너와 나를 끊임없이 가르는 쪽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세지움’을 골간으로 하는 정치화폐시스템은 왜곡된 힘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오염된 힘이 작동하는 시스템입니다. 이 자연스럽지 못한 오염된 힘을 관리하는 시스템은 비밀주의와 전문가주의를 ‘불가피한 정의(正義)’로 포장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음모)의 집행(=‘폭력 사주’)을 위해 별도의 힘(=비자금)을 조성하는 것 또한 불가피 한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이들이 ‘정치적 독립’[43]을 금과옥조로 삼으며, 조성된 힘(=비자금)의 규모와 내역 등을 ‘국가 안보’등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습니다.[44]
이 정치화폐시스템의 위기관리를 위한 핵심 과제는 첫째, “자신들이 발행한 ‘근본 없는’ 화폐에 어떻게 구매력(Purchasing Power)이라는 힘을 불어 넣고 유지시킬 것이며, 나아가 이 힘이 자신들의 통제에 반(反)하는 방향으로 이탈 하지 못하도록 어떻게 붙들어 놓을 것인가?”이며, 둘째, “이 오염된 힘의 산물인 ‘부당한 부(富)의 이전’, ‘구매력(Purchasing Power) 부족’ 그리고 ‘시장 가격 책정 시스템의 왜곡’ 등에 의한 사회적 엔트로피 증가에 따른 ‘열역학적 평형’이라는 시스템 파국(=시장의 실패)을 어떻게 회피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독점적 화폐발행권에 대한 도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일 것입니다.
만약, 정치화폐시스템의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던져(投資)진 돈(+)들 중 저축이나 투자 목적을 위해 이탈한 돈(+)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도록 유도될 수 있고, 이렇게 유도된 돈(+)들이 돈(+)에 첨부된 ‘청구권’을 통한 ‘양(+)의 확보(=부당한 부(富)의 이전)’라는 게임에 자유롭게 베팅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통제에 반(反)하는 방향으로의 이탈 방지’는 물론 ‘부당한 부(富)의 이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성되는 사회적 엔트로피 증가를 개인들에게 전가 시켜, 시스템 파국이 아닌 ‘개인들의 파국’으로 축소 분산 시킬 수 있는 ‘1타 2피’의 효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식, 채권, 보험, 금, 코인, 카지노, 복권 그리고 부동산 등 소위 ‘합법적 투자’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바로 이 목적에 충실히 부합하는 잘 조직된 그들의 장치(machine)로, 일명 ‘돈(-)의 도축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이상 징후 발생 등 문제가 커질 경우에는, 그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답시고 통화정책이니 재정정책이니 온갖 요란과 현란을 떨면서, 일명 ‘양털깎기’라고도 불리는 강공책을 휘둘러 피라미드 밑바닥에서 열일하고 있는 엔트로피 덩어리를 일시적으로 대규모로 회수하는 것입니다.
소위 ‘경기순환’ 혹은 ‘경기변동’이라는 것도, 거칠게 말하자면, 결국은 ‘신세지움’ 시스템 관리자가 돈(+)을 던졌다가 다시 회수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소방수가 스스로 불을 지르고, 영웅적으로 불을 끄는 짓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화폐발행권(Issuing Power)은 주권(Sovereign Power)과도 직결된 것이어서, 이를 둘러싼 시스템 관리자들과 정치권력과의 팽팽한 긴장과 갈등은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시스템 관리자들은 ‘주권을 등에 업은 일개 정치권력 집단에 의해 혹여 자신들의 독점적 화폐발행권이 찬탈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매우 섬세하게 음모를 꾸미고 매우 치밀하게 집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음모론’들은 이 음모들의 단편들을 일견할 수 있는 퍼즐 조각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정리하자면, 시스템 관리자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아마도 (1) ‘추상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수학적 음수(-)를 물리적 양수(+)로 바꿔 치기 한 자신들의 ‘장난질’이 만천하에 자명하게 폭로되는 것과, (2) 자신들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자신들을 실질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음수(-)의 귀환’일 것입니다.
‘장난질’이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한마음이라는 본심(本心)을 잃게 된 ‘나뿐인 마음’들의 어리석은 무지가 이 장난질을 묵시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지지는 지금까지도 시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제기되는 모든 의혹들에 ‘음모론’이라는 딱지를 붙여 주고, 여기에 잘 교육받은 경제학 박사들과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알아듣기 힘든 복잡한 ‘이론과 논리’로 융단폭격을 퍼붓게 되면 상황은 의외로 간단하게 수습이 됩니다. ‘나뿐인 마음’들의 무지와 아집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오히려 더 현실적인 위협은 (1) 주권(Sovereign Power)을 등에 업은 일개 세력 혹은 최고 권력자가 자신들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것과, (2) 자신들의 통제 밖에서 음수(-)의 현현을 가능케 하는 수단과 그 시스템의 존재(가능성)일 것입니다.
첫번째 위협과 관련한 흥미진진한 지나간 과거 사례들은 일단 접어두고, 현재의 시스템 관리자들이 어떤 대응을 하게 될지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것은 소위 ’현대화폐이론(MMT: Modern Monetary Theory)’이라는 비주류 거시경제이론 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정부(Sovereign Power)가 중앙은행을 거치지 않고 이자 지급이 불필요한 부채(돈(-))를 직접 발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화폐발행과 통화관리의 정치적 중립의 필요성’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로 시스템 관리자가 주권 (Sovereign Power)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그어 놓은 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부류의 위협은 부기적 개념의 화폐(시스템)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중세 유럽에서 사용되던 ’Tally Stick’ 이라는 ‘엄대’입니다. 버드나무 조각에 세부 거래 내역을 기록한 뒤 세로로 길게 반쪽을 갈라서 긴 쪽(Stock)은 채권자가, 짧은 다른 한 쪽(Stub)은 채무자가 보관하게 되는, 부채라는 음수(-)를 기록해 놓은 분산 장부(帳簿), 즉 돈(-)이었습니다.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은 1694년에 설립된 이래로 줄기차게 이 Tally Stick 시스템을 종식시키기 위해 공격했으나, 1세기가 지난 1826년이 되어서야 Tally Stick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성공적으로 통과 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법안을 통과시킨 영국 의회가 의사당 건물로 사용하던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1834년에 대형 화재로 전소되고 마는데, 이 화재는 상원 건물에 설치된 두 개의 화로에서 Tally Stick을 소각하다가 벌어진 참사였다고 합니다.[45]
그리고, 마침내! 영국 국회의사당을 불길로 집어삼킨지 근 2세기가 지난 현재,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Tally Stick의 진화된 디지털 환생이라 할 수 있는 ‘분산장부기술 (DLT: Distributed Ledger Technology)’ 입니다. 이 기술은 ‘중앙서버나 중앙관리자의 제어 없이 분산화 된 네트워크의 각 노드(개인)들이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하고 계속 동기화 시키는 기술’로, 이를 통해 소위 ‘권위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이라는 제3자의 개입 없이도 두 당사자가 직접 거래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감사의 증표’라는 원시적 형태의 장부가 예의 ‘확장성’ 문제와 관련해서 노정했던 ‘기술적 한계’들을 마침내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현대화폐이론(MMT)’과 ‘분산장부기술(DLT)’이 현 정치화폐시스템의 위협 요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현 시스템과 같은 하늘 아래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위협만은 아닌 것 또한 사실입니다.
‘현대화폐이론(MMT)’이 주장하는 바처럼, 위임 받은 주권(Sovereign Power)을 행사하는 ‘선출된 권력’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재창출에 필요한 소위 민주적, 진보적, 친 대중적 사회복지정책(보편적기본소득 포함)을 추진함에 있어, 이에 소요되는 재원 마련을 ‘세수(稅收)’나 ‘민간으로부터의 조달’이라는 기존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는 꽤나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시스템 관리자의 입장에서도, ‘선출된 권력’이 ‘제2의 프로메테우스’를 자처하며 돈(-) (=화폐 발행권한)을 개인들에게 되돌려주려는 시도만 하지 않는다면, 현대화폐이론(MMT)은 ‘선출된 권력’으로 하여금 ‘유권자’들을 달래고 순화시켜 아래로부터의 시스템 붕괴를 피할 수 있음은 물론 시스템을 더욱 공고화 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화폐발행과 통화관리는 여전히 자신들의 손 안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46]
분산장부기술(DLT)이란 것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분산장부기술(DLT)도 발권구매력 (Money Power) 회복과는 전혀 무관한 쪽으로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즉, 지난 수년 동안 분산장부기술(DLT)을 이용한 코인(암호 화폐라기 보다는 암호 자산), NFT(Non-Fungible Token) 등의 수많은 ‘가상 자산’ 실험을 통해, (1) ‘가상 자산’ 역시 여전히 ‘가치’라는 유령과 매우 높은 접착성이 있음을 확인 하였고[47], (2) ‘권위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기관’에 의해 통제 받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분위기까지 조성되고 있습니다.
수년 전부터 BIS, IMF 등을 중심으로 분산장부기술(DLT)을 기반으로 한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에 대한 연구와 개발이 진행되어 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선적으로 국가간 결제 시스템(도매용 CBDC)에 적용되어 현 고비용, 비효율 거래 시스템을 개선하고, 주권 국가 단위에서는 기존 중앙은행-민간상업은행의2단계 시스템 기반에서 현금만 사라지는 소위 ‘현금 없는(Cashless)’ 사회를 추진하게 될 것 입니다.
7.
정치화폐시스템의 관리자 입장에서 관건은, (1) ‘물질적 속성’을 벗어 던지고 추상이라는 무한 절대계로 진입한 ‘디지털(화 된) 화폐’에 어떻게 여하히 ‘양(+)의 탈을 씌우는 장난질’을 ‘지속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 즉 ‘특정 독점 기관에 의해서만 발행 및 관리되어야 하는 희소한 것’이라는 가상의 ‘물질적 속성’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유지 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2) 여전히 남겨진 가격 책정 시스템의 왜곡에 따른 ‘시장의 실패’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피해갈 수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48]
‘오염된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왜곡된 힘의 원천을 보전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돈(-)에 대한 무지와 돈(+)에 대한 아집이라는 견고한 막(膜)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모든 무지와 아집의 뿌리는 ‘너와 나를 가르는 나뿐인 마음’에서 싹트는 ‘두려움’과 ‘타인에 대한 혐오’이기에, 이 ‘두려움’과 ‘타인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것이 무지와 아집이라는 막을 견고히 유지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레이트 리셋(Great Reset)’,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Stakeholders Capitalism)’ 등을 주창하고 있는 ’세계경제포럼(WEF: World Economic Forum)’과 바티칸까지 끌어들여 ‘포용적 자본주의(Inclusive Capitalism)’ 교리를 전도하고 있는 ‘포용적 자본주의 위원회(Council for Inclusive Capitalism)’ 등이 오늘날 ‘두려움’과 ‘타인에 대한 혐오’를 전지구적으로 조장하여 자신들의 오염된 힘을 공고히 하고 있는 대표적인 최전방 공격수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웹사이트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이들이 추구하는 21세기형 새로운 자본주의는 예전처럼 기업의 소유자를 포함한 소수 주주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s Capitalism)’가 아니라, 경영관리자, 직원, 협력업체, 나아가 해당 지역 사회 시민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 (Stakeholders)의 이익을 아우르는(Inclusive)자본주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흡사, 이제까지 철저하게 외면해왔던 외부효과를 인정하고, 그간 철저하게 무시되어 왔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대오각성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요 협력자이자 현 정치화폐시스템의 관리자가 돈(+)을 움직이고 있는 방향은 저들의 번드르르한 선전 문구들과는 달리 80억 인류를 위한 보편적 풍요[49]의 방향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이들의 공통된 목표는 자신들이 내세우고 있는 의제들을 중심으로 단일화된 글로벌 통치 기반(Global governance platform)을 구축하여 모든 전지구적 사회경제활동이 자신들이 제시한 일종의 ‘투자 가이드라인(ESG: Environmental, Social and Corporate Governance)’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의제들이란 ‘그린 에너지(재생 에너지)’, ‘탄소 중립(Zero Carbon)’, ‘지속가능한 농업 (Sustainable Agriculture)’ 등 에너지와 식량 등 먹고 사는데 매우 중요한 문제에 집중되고 있지만, ‘기후변화’라는 빈약한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이데올로기적 접근에 가까울 뿐, 그 실상은 기존 관련 산업 및 생태계의 파괴와 통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지속가능성’은 오직 혼돈과 혼란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50]
사실, 이들이 줄기차게 제기하고 있는 ‘지속가능성’의 문제는 자신들이 이제까지 휘둘러 온 오염된 힘에 의한 ‘시장의 실패’가 낳은 필연적 결과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통제되지 않은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인간 행위(가 만들어 낸 결과)’로 호도하며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고, 한 발 더 나아가, ‘책임 있는 보호 및 관리’의 필요라는 명분을 내세워 인류의 ‘지구공유자산(Global Commons)’[51]에 대한 통제권 장악까지 주도 면밀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을에 불을 지르고 다닌 방화범이 화재의 원인과 책임을 마을 주민들의 무분별함과 무책임으로 돌리면서 스스로 소방수 역할을 자처하며 온 마을의 공유자산까지 자신의 통제 하에 두는 격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국제 자본 시장은 소위 Active Funds에서 Index Funds로의 대세 역전이라는 큰 변화를 맞게 되는데[52], 이를 통해 자산의 ‘집중화’가 진행되어 소위 ‘빅3’라 불리는 BlackRock, Vanguard, State Street가 이 시장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들은 자신들이 투자한 대부분의 상장기업들의 주주가 되어[53] 돈(+)줄에 이어 의결권까지 쥐게 됨으로써 자신들이 내세우는 의제들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완벽한 ‘추진력’을 확보하게 된 셈입니다.[54]
이제 남은 것은, 자신들의 단일화된 글로벌 통치 기반(Global governance platform)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국제 통화 및 금융 결제 시스템’의 도입입니다. 즉, 앞서 언급된 “현금 없는 CBDC정치화폐시스템”으로의 이행입니다. 오직 ‘순응하는 자’들에게만 디지털 아이디[55]와 함께 계정이 부여되며 이를 통해 ‘보편적 기본 소득’을 포함한 돈(+)을 하사 받을 수 있게 하고, 구매를 위한 결제와 이체 외에도 모든 거래 정보와 생체정보까지 모니터링 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질 것입니다. 물론, 순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계정이 동결되도록 설계되어질 것입니다.
지난 ‘코로나 팬더믹’은 이들이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해 온 것들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으며, 당연히 이들은 이 기회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과 ‘타인에 대한 혐오’를 가장 효율적이고 파괴적으로 극대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바이러스’라는 생물무기(Bioweapon) 만한 것이 없음을 확인하였고, 덩달아 자신들이 투자한 백신 장사는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프랑스의 임상 심리학자이자 정신병리학 박사인 Ariane Bilheran은 한 인터뷰[56]에서 ‘다보스 사람들(Davos Men)’[57], ‘수호자 (Guardians)’ 등으로 불리는 소위 ‘엘리트’들의 기저 심리 상태에 대한 오랜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취지의 흥미로운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변하지 않은 것 중의 하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의 피해와 희생으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월등한 수적 우위에 있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혹여 자신들의 일부 권리가 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필시 자신들을 죽이려고 들고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무의식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가진 자’들은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게 되는 것입니다. … (그리고) 자신들의 음모를 비판하고 폭로하는 사람들—그 음모가 ‘사실’ 혹은 ‘진실’이라면 이들은 철학자이거나 혹은 투사들일 것입니다—을 거짓 ‘음모론’에 빠진 피해망상증 환자로 몰아갑니다. 최근 코로나로 인한 전지구적 락다운 사태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의견을 제기한 이태리의 저명한 철학자 Giorgio Agamben 역시 ‘음모론자’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과연 어느 쪽이 피해망상증 환자인 것일까요? 스스로 박해 받고 있다고 여기고 있기에, 자신들을 박해하고 있다고 여기는 자들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망상에 빠진 미치광이들 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스스로 박해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진실은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정당하지 못함에 대한 스스로의 죄의식으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였으며, 예전에 없던 오늘날의 새로운 경향은 이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천착하는 것 자체가 범죄시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권력의 병리학’이라는 주제—정신병리학 차원, 즉 도착(倒錯)과 편집증이라는 병리적 측면에서의 ‘권력의 일탈’이라는 문제—를 오랜 기간 연구해 온Ariane Bilheran은 병리적인 ‘편집증적 망상’이 집단적 전염이 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인류 역사에서 전체주의(Totalitarianism)가 지속되는 원인, 즉 단지 ‘폭군의 존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전체주의의 존속 이유를 비춰줍니다. 그녀에 의하면, ‘전체주의’라는 현상에 공모적/공범자적 방식으로 참여하게끔 하는 무언가가 우리 인간의 내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마음’을 잃어버린 ‘나뿐인 마음’인 것입니다!
이 한마음을 회복하지 못하는 한, 이번 코로나 사태로 부끄럽게 증명했듯이, ‘바이러스 감염에 의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근거 빈약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스스럼없이 서로에 대해 “접촉을 피하거나 최소한 1m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잠재적인 위협 요인(Biohazard)”이 되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될 ‘항시적 공포와 불안‘이라는 뉴 노멀(New Normal)’인 ‘국가적/전세계적 비상 상태’ 혹은 ‘예외적 상황’의 반복으로 우리는 인간이기를 포기한채로 달랑 허락된 생물학적 차원의 생명만 유지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인간을 ‘해킹 가능한 동물(hackable animals)’로 재발견한 소위 ‘트랜스휴머니트스트’ (Transhumanists)들의 노고로 우리 인간은 ‘자유’, ‘정의’, ‘인간애’, ‘양심’, ‘한마음’, ‘홍익인간’ 등과 같은 인간 내면의 ‘오작동’을 근본적으로 차단시킬 수 있게 됨으로써—'영적 할례’ 대신 ‘영적 거세’를 택함으로써—‘양심의 고통’ 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의 저자이자 대표적인 ‘트랜스휴머니스트’이며 WEF의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사학자 Yuval Harari가 인간을 대하는 태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데이터가 충분하고 컴퓨팅 능력이 충분하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잘 이해될 수 있게 되며, 따라서 전에는 불가능했던 방식들로 사람들을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해킹 가능한 동물이 된 시대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재창조해야만 한다. 영혼이니 정신이니 자유의지니 하는 따위는 더이상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 Yuval Harari
“인간은 오직 육체적 능력과 인지적 능력이라는 두 가지 기본 능력을 갖고 있을 뿐이다. 육체적 능력을 기계가 대체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인지적 능력을 요구하는 일자리로 옮겨 갔다. 만약 인공지능(AI)이 우리 인간보다 뛰어나게 된다면, 인간이 옮겨갈 수 있는 제3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 Yuval Harari
"다가오는 시대의 경제 정치 영역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는 아마도 이들 쓸모없는 인간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닐까 싶다. 기본적으로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이들이 갈수록 지루해질 자신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냐는 소리다. 현재로서는 마약과 컴퓨터 게임의 조합이 이에 대한 최선의 방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 Yuval Harari
그렇다면, 돈(-)의 ‘불임(不妊) 시스템’라 할 수 있는 현 정치화폐시스템에서 과연 돈(-)의 귀환은 난망하기만 한 것일까요?
Buckminster Fulller (1895-1983)는 생전에 “우리가 주엔진이 고장 날 경우를 대비하여 보조엔진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해놓는 것처럼, 우주와 대자연 역시 우리 인간 존재를 설계할 때 그와 유사한 ‘안전 장치(fail-safe)’를 심어 놓았다”고 확신을 갖고 계셨습니다.
만약, 그의 확신대로, 현 정치화폐시스템의 모든 주기능들이 차단될 경우, 휴면 상태에 있다가 활성 될 ‘안전 장치(fail-safe)’가 있다면, 바로 그 ‘안전 장치’가 돈(-)의 귀환을 잉태하게 될 자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먼저, 마일리지와 쿠폰 등과 같은 ‘고객보상프로그램’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판매자가 자신의 판매 실적을 높이기 위한 마케팅 수단에 지나지 않지만, 그 안을 들여다 보면, 판매자가 “조건이 충족될 경우 미래 시점에 자신 소유의 가치(=상품)를 포기하겠다”는 구매자에 대한 약속으로도 읽힐 수 있게 됩니다. 즉, 판매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구매자를 대신하여 구매자가 잃어버린 발권력(Issuing Power)을 판매자 자신이 간접적으로 행사하는 것이고, 약속된 조건이 충족되면, 판매자는 약속된 자신 소유의 가치를 포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약속된 구매력(Purchasing Power)을 구매자에게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매력은 돈(+)과는 달리 보편적 구매력의 지위를 얻지 못하고 제한적으로만 사용되지만, 동일 생태계 내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소비 능력을 지혜롭게 조직하여 개별 판매자들이 발행하는 마일리지와 쿠폰이 동일 생태계 내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게 한다면, 이 마일리지와 쿠폰은 곧 돈(-)이 됩니다.
분산장부기술(DLT)’의 발전으로 일부 제조업체들은 자신들의 브랜드와 제품에 일종의 ‘마이크로 소유권 모델(Micro-fractional ownership model)’을 도입하여, 브랜드와 제품 구매자들에게 마이크로 지분을 제공하여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듯이 발생한 수익을 공유함으로써(RSS: Revenue Sharing System) 고객의 충성도를 유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위 두 경우 모두 ‘지혜로운 소비’의 문제로, 공동체가 이를 현명하게 잘 조직해 낼 수만 있다면 돈(-)의 귀환을 앞당기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앞서 ‘돈(-)의 도축장’이라고 부러 폄하했던 곳의 일부에서도 ‘안전 장치(fail-safe)’로 의심되는 것이 발견됩니다. 다름 아닌 카지노, 복권, 게임 시장입니다. 이 시장들은 다른 시장들과는 달리, ‘나’ 뿐만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돈(+)을 흔쾌히 ‘즐겁게’ 포기하는 시장으로, 이 역시 어떻게 재조직하는가에 따라 돈(+)의 화장터임과 동시에 돈(-)의 자궁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김상준 교수님의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 라는 책은 ‘팽창문명과 내장(內張)문명 간의 길항’이라는 탁월한 관점을 제시하며 소위 ‘근대화’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되짚어보게 해줍니다. 이 책에서 팽창근대란 ‘낙차(落差)에너지를 이용한 근대적 성장’을, 내장근대란 ‘밀도(密度)에너지를 이용한 근대적 성장’을 뜻하는데, 이 ‘낙차 에너지’를 주요 동력으로 삼는 팽창문명의 골간이 다름 아닌 정치화폐시스템이며, ‘밀도 에너지’를 주요 동력으로 하는 내장문명의 골간은 개인화폐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상준 교수님은 “’팽창적 낙차 효과’는 점차 사라지고 ‘내장적 밀도에너지’가 중요해지는 세계상황으로 점차 변화하고 있다”는 낙관적 희망을 피력하고 계십니다. 저도 반드시 그리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 ‘낙차 에너지’가 0에 수렴하게 되어 ‘자연선택’에 의해 ‘밀도 에너지’로 전환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양자 물리학에서, 바닥상태의 에너지를 나타내는 ‘영점 에너지(zero point energy)’의 물리량은 0이 아닌 ‘무한의 최소량’을 갖기 때문입니다. 즉, 현 정치화폐시스템에서 개인화폐시스템으로 재기 발랄하며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이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낙차 에너지’는 0과 1사이에서도 무한대로 끌어 올려질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팽창적 길’을 “끝내야 하는” 것과 “끝나면 어디로 가게 된다”라는 예측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내장문명과 내장근대의 기초, 골간, 법칙을 이루며 전승되어 온 우애와 협동의 원리”가 ‘재난상황’과 같은 ‘예외적 상황’에서만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9/11, 코로나 팬데믹 등과 같은 ‘재난상황’의 본질은 ‘적대의 외부화’를 통한 ‘예외적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낙차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길어 올리려는 자들에 의한 적극적 권력 행사의 산물이라는 점이 가려져서는 안됩니다. 이 점을 배제하고 대자연이 하사해주는 ‘우애와 협동의 예외’로 건너 뛰어서는 안된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린뉴딜’ 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지막으로, 현 정치화폐시스템에서 개인화폐시스템으로의 재기 발랄하며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이행을 어디선가 숙성 시키고 있을 한마음의 마술사들과 전사(戰士)들을 생각하며, <돈과 마술에 대하여 On Money and Magic>[58]라는 짧은 글을 요약 인용합니다.
“개별 환타지들이 인식가능한 일련의 사회학적 과정을 거쳐 사회적 실체로 자리매김되는 것을 우리는 '마술'이라고 부릅니다. 화장실 휴지로도 쓸모가 없는 종이 쪼가리에 초록색과 검정 잉크로 몇자 끄적여 놓은 '돈'이라는 것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그저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 것에 어떤 가치를 불어 넣어 새로운 가치 담지자로 탈바꿈 시키려는 한 개인의 환타지가 모든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고 받아들여져 더이상 환타지가 아닌 엄연한 사회적 실체가 되어버린 것, 그것이 돈이며, 강력한 마술인 것입니다.
이 마술의 관건은 그 집단적 환타지에 균열이 가지 않도록 여하히 잘 관리하는 것이며, 인류 역사는 이 마술을 관리하는 제도적 장치들의 진화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허나, 작금 우리는 이 진화과정에 새로운 경향이 출현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데, 기존 마술의 정교한 관리를 넘어 서는 새로운 차원의 마술이 시도되고 있고, 그러한 시도의 근저에는 다름 아닌 우리들 스스로가 '마법사들'이라는 자각이 깔려 있습니다.
중국 인민폐가 QQ Coin의 공격으로부터 그 지배적 지위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QQ Coin이 가짜여서가 아니라 국가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인민폐 주문을 외워 대는 마법사들의 힘이 더 막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게임 디자이너들은 돈 뿐만 아니라 다른 마술(의미, 기술 등)들도 함께 엮어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오직 기존 마술들을 관리하는 기술만 갖고 있는 반면, 게임 디자이너들은 마술을 부리는 법 자체를 배워가고 있기 때문에 이 젊은 마법사들이 앞으로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시점이 도래하기 전까지 그들은 정부를 상대함에 있어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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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베푸는 자 얻을 것이요, 저만 챙기려는 자 잃을 것이다.
신시개천 5919년
<별첨> Flight From Inflation, 9장 전문 - E. C. Riegel
경제 민주주의
고대인들의 의식 속에 또아리를 튼 '저항 혹은 반란' 이라는 작은 샘물에서 솟아난 '민주주의'는, 그 유구한 세월 동안 깊고 넓은 강물이 되어 신성한 권력과 귀족적 선호라는 기만 위에 세워진 고대의 모든 부당한 정치적 통치 형태들을 휩쓸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 영역에서의 '폭정에 대한 반대'에 지나지 않는 반쪽자리 '민주주의'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진정한 완결된 결실은 다가오는 미래에 '경제'라는 영역에서 맺게 될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끊임없는 도전으로 인해 현대 국가들은 표면적으로나마 과거의 오만함을 벗어 던지고, "민주적 정부" "인민의 통치" "평등" "복지 국가" 등과 같은 그럴싸한 수식어들로 자신들의 반동적 본질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늬만' 민주주의는 사실 민주주의의 실패에 대한 방증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사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국가는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긍정적 기관이기에 인민들은 국가의 주도권과 지도력을 따라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입니다. 경제적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국가가 할 수 있는 것 이라고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는 것 외에는 없음에도, 인류의 모든 병폐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겠다는 정치인들의 선전선동을 무턱대고 비난만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허나, 정치적 수단이 아닌 경제적 수단을 통해 기능하는 어떤 해결책이 제공되기 전까지, 인류의 고통은 '구원의 정치적 수단'이라는 헛된 믿음 아래 계속될 것입니다.
정치의 영역에서 민주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성취는 '다수의 지배'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민주주의가 사회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의 전부라면, 이제까지 인류가 쏟아 부은 피와 눈물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고작 소수의 손에서 다수의 손으로 정부 권력을 옮기기 위해 피를 흘렸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자기 발현'을 가로막는 그 어떤 힘 (veto power)이 존재하는 한—그 힘 (veto power)이 말(馬) 안장 위의 한 사람에 의해 행사되든 혹은 투표함을 통해 행사되든—인간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충족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소위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수단은 '대중 선거' 외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한 번씩 치뤄지는 선거를 통해 세상살이의 주요 현안에 대한 사람들의 의지를 담아내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자, 이제 이 가짜 민주적 과정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주적 표현을 얻을 수 있는 영역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립시다. 이 영역은 진정한 투표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한 표는 구매자의 분명하고 되돌릴 수 없는 명령을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해 구매자는 자신의 의지, 열망, 자유 그리고 개성을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이 투표 시스템에서 선거는 매일 매시간 마다 치뤄집니다. 투표 장소는 전 세계의 시장들이며, 후보자들은 경쟁 업체들이 제공하는 재화와 용역들입니다. 이 투표 시스템에는 다수에 의한 폭정이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유권자들이 선거에서 승리를 합니다. 그가 파란 라벨을 선택하든, 빨간색 혹은 녹색 라벨을 선택하든 어느 누구도 그의 선택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왕이며, 경제 유권자는 협력하는 주권자들로 구성됩니다.
이 투표 시스템은 경제 민주주의 집행 기구(the house of economic democracy)가 자신의 배타적 주권을 확고히 하는 선거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인간이 만든 법이 아니라 자연법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입법 과정을 생략합니다. 절대적 공평(absolute equity)을 제공하는 이 법은 경쟁의 자연법, 더 정확히는 협력의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협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자동적으로 보상을 제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보상을 보류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제 민주주의 집행 기구는 그 어떤 입법, 행정, 사법 체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권한들이 다름 아닌 구매자에게 있으며, 구매자는 단순히 자기 이익 기준에 따라 이 권한들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전체는 그 부분들로 구성되기에 무한한 변수와 환경 속에서 구매자들이 행사하는 이 권한들은 완벽한 사회 질서로 통합됩니다.
국가의 모든 권력은 시민들에 의한 위임에 의해 부여되거나 혹은 폭력적 찬탈에 의해 부여됩니다. 그런데, 국가가 지니고 있는 '화폐발행권한(money power)'을 우리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그 권한은 대리인 자격으로 국가에 위임될 수도 없고 그 권한의 주체로서 국가에 의해 행사되어질 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화폐발행권한은 생산 능력(production power)이 발현되는 동일한 곳에서만 발현될 수 있고, 교섭력(bargaining power)과의 제휴를 통해서만 행사될 수 있습니다. 이 권한들은 정부가 아니라 개인들에게 속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개인들만이 부를 생산할 수 있고, 개인들만이 시장에서 자신들의 선호를 내세우며 협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개인들이 아닌 다른 원천에서 발행된 그 어떠한 공인된 화폐일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위조 화폐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화폐 기능에 의존해야 하는 사회 질서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생활 수준이 원시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향상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의 전문화/분업을 통해서 이며, 이 노동 분업이 교환을 가능케 했고, 화폐의 사용이 이 교환을 촉진시켜 왔기 때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가격 책정 시스템'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전문화된 노동을 어떤 제품 생산에 투입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생산과 교환은 방대한 협력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 시스템 내의 협력자들은 대부분 낯선 관계이고 대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 시스템 하에서 전문화된 인간 에너지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직접 사용할 목적이 아닌 것들을 생산하는데 바쳐집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생산한 제품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제품에 대해 가격의 형태로 시장이 반응하는 것을 통해서 입니다. 이 ‘돈-가격 책정 시스템’은 교환의 안테나 역할을 하며, 상호 이해 관계가 있는 구매자와 판매자를 한데 모으고, 그 과정에서 이러한 이해 관계를 재구성하고 재조정함으로써 수요와 공급에 대응하는 협력 메커니즘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우리가 시장에서 구매를 위해 돈을 서로 주고 받을 때, 우리는 돈의 섬세하고 치밀한 측면, 즉 돈이 경제 민주주의의 공정성을 유지하고 사회 질서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매를 위한 모든 돈 거래는 시장에서 해당 상품들의 가격을 변동시키는 요인으로 등록되며, 이 등록된 가격들은 해당 상품의 생산에 신호를 보냄으로써 모든 가치의 생성자인 인간 에너지가 지능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재조정은 밤낮으로 매순간 진행이 됩니다. 이는 인간 에너지를 보존하고 구매자의 의지에 즉각 호응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항시적으로 상을 내리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벌하는 사회 진보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만약 이 지구상에 '전능(全能)'이라는 것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기 '돈-가격 책정 메카니즘'에 깃들어 있고, 행정관료들의 '맹목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정치 기획자들이 제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만물을 꿰뚫어 보는 눈 – 가격 책정 메카니즘 –인 것입니다.
경제 민주주의가 인류 복지를 위한 잠재력을 보여주는 것은 화폐 시스템의 유지와 완전함을 통해서 입니다. 이를 통해서 국가가 자신이 행사할 수 없는 권한을 행사하려 함으로써 위협받고 있는 작금의 재난을 피할 수 있습니다. 돈과 관련한 복잡한 이론과 설명들을 우리가 무시한다면, 이 도전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화폐 본연의 목적이 아닌 정치적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거짓된 화폐 발행 권한을 폐기합시다. 화해할 수 없는 것을 화해시켜려 노력하지도 말고, 정당하지 못한 것을 어떤 보호 장치를 통해 정당화 시키려 하지도 맙시다.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비정치적 화폐 시스템'의 구축은 그저 회계상의 약속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치적 화폐 개념을 포기할 때 우리는 화폐 민족주의 개념도 포기합니다. 교역은 동질적인 것으로 민족, 종족, 피부색, 신조 그리고 계층 등을 알지 못합니다. 더욱이 진리는 보편적입니다. 화폐 과학이 발전을 하게 되면, 오늘날 수학이 그러한 것처럼, 거기에는 지역이나 국가별로 쪼개지는 일이 더 이상 없게 될 것입니다. 하여, 보편적 화폐 단위 그리고 정치적 경계선과 무관하게 작동될 시스템에 대한 전망이 우리 앞에 열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국적도 정치도 없을 것이고, 어느 누구도 참여를 강요 받지 않으며, 참여를 거부 당하지도 않을 것 입니다. 화폐와 관련한 단 하나의 언어만 존재할 것이며, 민주적 화폐 시스템은 교환이라는 보편적 자유를 누리는 모든 사람들을 결속시킬 것 입니다. -끝
[1] Debt: The First 5000 Years, David Graeber, 2011
[2] Unto This Last, John Ruskin, 1862. - 이 책은 원래 Cornhill Magazine이라는 문예 월간지에 1860년 8월부터 연재되었던 4편의 글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글들이 연재되는 동안 연재를 중단하라는 압력이 있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비난과 반발이 있었다고 합니다. 허긴, 그 시절은 ‘영재교육이 만들어 낸 신동’ John S. Mill(1806~1873)과 그를 추종하는 ‘전문가’들이 대세였을 텐데, 예술 평론이나 하던 듣보잡이 자신들의 ‘전문 영역’을 휘저어 놓았으니, 그들의 난동이 어느 정도였을지 대충 짐작이 갑니다.
[3] Unto This Last, John Ruskin, 1862
[4] “너희 목자 없는 양떼여, 너희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고 있는 곳은 목초지가 아니라 바로 '현존(現存the presence)'이니라.” - Unto This Last, John Ruskin, 1862
[5] 이 ‘기꺼이 포기함’의 다른 이름은 베풂, 나눔 입니다.
[6] Private Enterprise Money: A non-political money system, E.C. Riegel, 1944
[7] ‘발권구매력(Money Power)’이 여전히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현재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 것인지 깊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 별첨한 E. C. Riegel의 Flight from Inflation의 9장 (경제 민주주의) 전문 참조
[8] 만약 ‘Social affection’을 조선시대 선비나 스님들이 번역하였다면, 분명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각지불이(各知不移)', ‘자타불이 (自他不二)’ 등으로 번역하였을 것입니다.
[9] 교환 ‘수단’ 대신에 교환 매질이라고 표기한 이유는 ‘수단’이라는 어휘가 무의식적으로 연상시키는 ‘오감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물질적 속성을 갖는 어떤 것’이라는 착각을 피하기 위해서 입니다. 교환 매질일 뿐인 ‘증표’는 발행 시점에 그 효력을 뒷받침 해주는 포기된 부(富)에 대한 기록(=簿記)일 뿐, 그 기록을 위해 사용된 소재의 물질적 속성(物性)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10] Energy, Entropy and the Theory of Wealth, John Constable, 2016
[11] Unto This Last, John Ruskin, 1862. “부자가 된다는 것은 유용한 것들을 많이 보유하는 것”이라는 J.S. Mill의 부(富)에 대한 정의를 비판하면서, John Ruskin은 ‘유용한 것들의 소유’ 대신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것들의 소유”로 단서를 달아, '가지고 있다'는 것의 의미가 절대적인 힘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힘은 소유된 물건들의 성질이나 수량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적합성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에 의하면, 부(富)란 “소비 능력과 역량을 갖고 있는 용감한자에 의한 유용한 것들의 소유 (the possession of the valuable by the valiant)” 입니다. 여기서 ‘용감한자’란 부(富)를 그저 쟁여 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할 줄 아는 자를 말합니다.
[12] 같은 영장류에 속하는 유인원과 인류를 결정적으로 구별 짓게 해주는 것은 생물학적 요인이 아니라 ‘불의 사용’입니다. 인류는 ‘불’이라는 에너지를 통제할 줄 알게 된 이래로, “나무 à 숯, 목탄 à 석탄 à 석유, 가스 à 핵분열 à 핵융합 à 물질-반물질 반응”에 이르기까지 에너지 밀도가 더 높은 형태의 불들을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Lyndon LaRouche는 이것이 경제 성장의 비밀이자 과학이라고 언급을 하며, 이를 경제의 ‘에너지 흐름 밀도(Energy Flux Density)’라 이름 짓고, 1인당 또는 단위 경제 면적당 에너지 사용 비율로 측정 가능한 지표로 삼았습니다. 이 에너지 흐름 밀도(Energy Flux Density)의 증가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기술, 새로운 자원 기반, 새로운 생활 수준, 그리고 새로운 경제를 창출하여 사회 전체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에너지 흐름 밀도(Energy Flux Density)의 증가를 고려를 하지 않는 현재의 에너지 관련 ‘투자 및 경제 정책들’은 그 의도의 순수성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3] Unto This Last, John Ruskin, 1862
[14] Scientific Solution of the Money Question, Arthur Kitson, 1894.
[15] Energy, Entropy and the Theory of Wealth, John Constable, 2016
[16] “물질적 부(富)에 대한 정의를 ‘자신의 재량으로 획득 및 처분할 수 있는 재화와 용역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건전한 화폐에 기반한 부(富)의 창출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엔트로피 감소를 의미하며, 그렇게 창출된 부(富)는 동료 인간을 위해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 2021 Letter to Shareholders - Cathedra Bitcoin Inc
[17] 물리학자 Erwin Schrödinger는 살아있는 유기체를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존재'로 보았는데, 이는 유기체들이 끊임없이 '음(陰)의 엔트로피(negative entropy)'를 주위로부터 흡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What is Life?, Erwin Schrödinger, 1944
[18] Wealth, Virtual Wealth, and Debt, Frederick Soddy, 1926
[19] Money versus Men, Frederick Soddy, 1933
[20] “경제에 있어서 돈은 축구에 있어서 축구공과 같다. 축구 경기에서 축구공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그 공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경제라는 경기에서도 돈의 소재가 무엇인지 그 돈의 주인이 누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 Natural Economic Order, Silvio Gesell, 1916. Silvio Gesell은 ‘돈’이라는 교환 ‘수단’의 소재적 속성이 교환 수단 본연의 역할과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명료하게 논증함으로써, 수천 년 동안 집착해 온 ‘소재의 함정’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옵니다.
[21] 이는 실로 최고 최대의 우주적 ‘자포자기(自暴自棄) 스캔들’이자 ‘페티쉬(Fetish)’가 아닐 수 없습니다.
[22] “'부(富)의 포기'가 실질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표현 보다는 “'부(富)의 포기'가 엉뚱한 곳에서 부당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23] “인간의 경제적 삶은 영적인 삶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점점 더 구석으로 밀려나고 있는 영성(靈性)은 더 이상 인간에게 삶의 방향과 지표를 제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The Fate of Man in the Modern World, Nikolai Berdyaev (1874–1948), 1934
[24] “돈과 상품 사이에 공통의 무엇이 있기 때문에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둘 사이에는 공통되는 것이 없어 비교될 수도 없다. 다만 양 당사자가 교환을 통해 이득을 보기 때문에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도대체 여기서 뭘 '측정'하겠다는 것인가? ….. 돈의 ‘구매력’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폐기되어 마땅하다. 가격은 흥정의 결과물일 뿐이며, 수많은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 Natural Economic Order, Silvio Gesell, 1916
[25] 역설적으로, ‘가치 표준’이 존재한다는 망상의 산물인 소위 ‘금리’(혹은 이자율)라는 것이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보면, 이것이 얼마나 황당한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금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심지어 ‘정책 변수’가 되어 인위적으로 변동시키기까지 합니다. 눈금이 수시로 변하는 저울이나 자는 오직 사기꾼들의 도구일 뿐입니다. 금리가 변동한다는 것은 척도의 눈금이 변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이 ‘금리’라는 눈금으로 ‘장난질’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만큼은 매우 관대합니다. 사기꾼이 아니라 심지어 ‘마에스트로(Maestro)’라는 극존칭까지 붙여줍니다.
[26] “'가치 표준'이라고 알려진 말도 안되는 황당함이 폐지되고, 화폐의 발행을 제한하는 법률들이 폐지되는 순간 , 돈은 가치의 변하지 않는 공통 분모라는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물건에 대한 가격은 교환 수단에 대한 수요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 물건에 대한 수요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 Scientific Solution of the Money Question, Arthur Kitson, 1894
[27] Natural Economic Order, Silvio Gesell, 1916
[28] 그는 노벨 경제학상이 아니라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29] Wealth, Virtual Wealth, and Debt, Frederick Soddy, 1926
[30] Wealth, Virtual Wealth, and Debt, Frederick Soddy, 1926. 현대화폐이론(MMT: Modern Monetary Theory)의 논점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은, 개인화폐시스템과 정치화폐시스템의 구분 없이, 정치화폐시스템 내에서 정부가 중앙은행을 거치지 않고 발권력을 직접 행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 이론을 소개하고 있는 <나라가 빚을 져야 국민이 산다>(전용복, 2020)는 책의 제목은 그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은 나라가 빚을 지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빚(신세)을 져야’만 합니다.
[31] The Theory of Credit, H. D. Macleod, 1889 (Wealth, Virtual Wealth, and Debt에서 재인용).
[32] Unto This Last, John Ruskin, 1862
[33] 안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몹쓸 습관은 여기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세(=빚) 지는 능력’은 기꺼이 포기함, 즉 베풂과 나눔의 짝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34] Debt: The First 5000 Years, David Graeber, 2011
[35] Scientific Solution of the Money Question, Arthur Kitson, 1894
[36] “은행의 지하 금고에 보관된 돈은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상품에 대한 막대한 수요를 만들 수 있지만, 수천명의 굶주린 실업자들은 그 어떤 상품에 대한 수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 Natural Economic Order, Silvio Gesell, 1916
[37] “불건전한 법정 화폐(의)…. 통화 공급에 대한 적극적인 관리는 가격 신호를 혼란스럽게 하여 그 안에 포함된 정보를 축소시키고 경제적인 바벨탑을 쌓아 올린다. 따라서 법정 화폐는 잘못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도록 잘못된 투자를 유도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게 된다.” - 2021 Letter to Shareholders - Cathedra Bitcoin Inc
[38] 이를 부르는 다른 이름은 ‘갈취’ 또는 ‘착취’입니다. "소위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이 폭력을 오히려 감싸고 도는 법학과 들러붙어 딴짓 하느라 바쁘지 않았더라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부당한 부의 분배 현상이 돈과 관계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고, 또 오직 이 돈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타인의 노동을 통제하여 그들을 노예화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 톨스토이 (Scientific Solution of the Money Question에서 재인용)
[39] ‘영구기관’에 대한 인간의 욕정과 갈망은 발권력(Issuing Power)을 스스로 박탈한 ‘나뿐인 마음’들이 자신들의 본성에 숨어 있는 “무진장(無盡藏)”에 대한 안타까운 무의식적 동경, 즉 ‘일그러진 발권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40] Money versus Men, Frederick Soddy, 1933
[41] Robert Kiyosaki류의 접근은 ‘돈’에 대한 대승적 접근이 아닌 소승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2] Natural Economic Order, Silvio Gesell, 1916
[43] ‘주권(Sovereign Power)으로부터의 독립’이 더 올바른 표현이겠습니다. 중앙은행의 중앙은행이라 불리는 BIS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는 치외법권이 적용되어 소재국인 스위스를 포함하여 그 어떤 나라의 사법권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System)등을 위시한 대부분 국가의 중앙은행들은 ‘정치적 독립’과 ‘국가 안보’ 등을 이유로 자신들의 비밀주의를 고수하며 ‘주권’에 대한 의무를 가볍게 무시하고 있습니다.
[44] 미국 투자은행 근무 시절 “지자체의 공익사업 채권(Public Utilities Bonds)의 대모”라는 별칭을 얻었었고, 아버지 부시 행정부 시절 주택도시개발부 (HUD: United States Department of Housing and Urban Development)의 주택 담당 차관보를 지냈던 Catherine Austin Fitts는 미국 행정부에 의한 비자금 조성을 다음의 세 가지 대표적인 법안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1934년 ‘금 보유 법안 (Gold Reserve Act)’에 의해 설립된 외환안정기금 (ESF: Exchange Stabilization Fund), (2) 1947년 국가보안법 (National Security Act)에 따른 안보 인프라 구축, (3) 1949년 중앙정보부법 (CIA Act)에 의한 비밀예산 (black budget) 편성 등 입니다. 그녀는 ESF를 ‘비자금의 왕’ (“Mother of All Slush Funds”)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1998년에서 2015년 사이에 HUD와 DOD(미 국방부)를 통해 ‘사라진 돈’의 규모는 약 21조 달러이며, 2009년부터 2012년 사이에 풀린 구제금융의 규모는 약 24~29조 달러였다고 합니다. – The State of Our Currencies, The Solari Report 2nd Quarter 2019 Wrap Up
[45] 런던 대영박물관에는 화폐의 발전 역사를 일람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나Tally Stick은 언급도 전시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Tally Stick실물은 개인들이 기증한 유물들이 전시된 특별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46] 맥락은 다르지만, 이 점에서 BlackRock의 위상과 그들이 2019년에 중앙은행들을 상대로 제안한 “Going Direct”를 꼼꼼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47] ‘가치’라는 유령을 계속 부여잡으면서도 ‘가치 변동이 없는’ ‘Stable Coin’을 만들겠다는 논리와 시도도 황당하지만, 이를 ICO(Initial Coin Offering)니 TGE(Token Generation Event)니 해가며 경쟁적으로 시장에 팔아 ’돈사고’ 있는 상황도 무척이나 어지럽습니다. 결국, ‘돈’에 대한 무지를 지속시켜 (=‘영혼의 할례’를 성공적으로 저지시켜) ‘가치’라는 유령(탐욕, 나뿐인 마음)의 배회가 ‘지속가능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위협 요소들 조차도 정치화폐시스템의 공고화를 위해 포용 될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48] “여러 면에서 CBDC는 완벽한 맬더스주의의 구현이다. 고유한 프로그래밍 기능을 통해 정치적으로 강력한 ‘더 큰 선(善)’이 무엇이든 간에 자원을 세분화되고 하향식으로 배급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일이 일상화 될 것이다. “삐익~ 죄송합니다, 고객님! 이미 주간 쇠고기 할당량을 초과했기 때문에 결제가 거부되었습니다. Bill Gates가 개발한 ‘완두콩 단백질 패티’와 같은 보다 환경 친화적인 대안은 어떠신가요? …… 이러한 시스템은 매우 효율적인 규제가 가능해서 시민들로 하여금 권력자(또는 이를 지원하는 기업 이익)가 선호하는 재화와 서비스에만 돈을 쓸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따라서 CBDC는 가격 메커니즘을 더욱 왜곡하여 다양한 시장의 실패(현재의 에너지 위기와 같은)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 2021 Letter to Shareholders - Cathedra Bitcoin Inc
[49] “보편적 풍요의 조건은 오늘날 잘나가는 사람들을 유복하다고 여기는 조건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까지 설명하기에는 잠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보편적 풍요의 가능성에 대해 천착하면 할 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보편적 풍요의 세상에서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입니다.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보편적 풍요의 시대가 오면 잃을 것이 있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터무니없게도, 평화적 건설을 위한 과학적 성과의 적용을 거부하면서 파괴를 위해 기어를 넣고 연료 밸브를 최대로 열어 놓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Money versus Men, Frederick Soddy, 1933
[50] 세계3대 자산관리사 (Big 3)로 불리는 BlackRock, Vanguard, State Street의 자산운용규모는 2022년 1월 기준 각각 10조 달러, 8.3조 달러, 3.3조 달러 입니다. 이들이 주도하고 있는 에너지 분야의 ESG 투자 가이드라인은 에너지흐름밀도(Energy Flux Density)를 고려하지 않은 퇴행을 의미합니다. ‘사모펀드 2차 시장(private equity secondary market)’의 큰 손으로 알려진 Coller Capital이 식량 분야의 ESG 투자를 주도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FAIRR Initiative는 온실가스 배출 주범이라는 이유로 최근 네덜란드의 축산 농장 2500여 곳을 폐쇄시켰습니다.
[51] 공해, 대기, 우주, 남극, 사이버 공간
[52] 2017년에 발표된 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에서 2015년 사이에 투자자들이 펀드매니저가 관리하는 뮤추얼펀드를 매도한 규모는 약 8천억 달러였으나, 같은 기간 투자자들이 매입한 인덱스 펀드와 ETFs의 규모는 약 1조 달러로, 이는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던 투자 행태의 변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53] 상기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빅3’가 S&P 500기업 중 단일 최대주주로 있는 기업은 88%에 해당하는438개 기업이라고 합니다.
[54] BlackRock의 회장 겸 CEO인 Larry Fink가 자신의 고객들과 기업의 CEO들에게 매년 보내는 연례 서한은 흡사 황제가 제후들에게 내리는 칙서(勅書)와도 같습니다.
[57] WEF의 Klaus Schwab이 1993년부터 시작한Global Leaders for Tomorrow 프로그램 (2004년에 Young Global Leader로 변경)이 배출해낸 전 세계 정계, 재계, 언론계 등에 포진해 있는 주요 인물 명단은 Malone Institute에서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58] On Money and Magic, Journal of Virtual Worlds Research vol. 2(4), February 2010, Edward Castronova, Indiana University. 이 글은 2007년 2월, 중국인민은행이 당시 엄청난 새바람을 일으켰던 가상화폐 QQ Coin (중국 Tencent사가 개발한 QQ라는 인스턴트 메세징 어플이 제공하는 게임 등에서 사용되던 가상화폐)에 대한 규제를 공식화했던 사건을 두고 미국 인디아나 대학의 한 교수가 발표한 글입니다.